_마을은 끝내 가라앉았다_영주댐과 4대강
_백발꽃은 지지 않았다_밀양
_후쿠시마에서_동일본대지진
마을은 끝내 가라앉았다_영주댐과 4대강
들녘이 잠겼다. 흐르던 물은 댐을 밀어내지 못하고 차올랐다. 강아지 메리도 자전거 타는 노인도 이제 없다. 새벽일 나가는 촌부도 등교하는 아이들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 흰 눈이 와도 그 마을엔 가 닿지 않을 것이다. 바람이 불어도 거기 무엇하나 흔들지 못할 것이다. 마을은 그 숱한 추억을 묻고 끝내 가라앉았다.
4대강 사업이 시작되던 해 전격적으로 발표된 댐 건설은 4개월 만에 착공에 들어갔다. 반대는 소용없었다. 댐은 오래된 마을과 유적을 수몰시키고 수많은 사람의 삶터를 빼앗았다. 댐의 목적은 보 건설로 나빠지는 낙동강 수질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보를 만들지 않았다면 필요하지 않았을 댐으로 인해 500여 가구가 이주했고 내성천의 금모래가 골재로 팔려나갔다. 2016년 댐은 공사 6년 만에 완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권력이 바뀌고 사업은 비리의 오명을 쓰고 실패작으로 낙인찍혔지만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파국은 멀리서 온다. 사정없이 몰아치는 그 차가운 힘은 멀리서 와서 오래된 것들을 쓸어버린다. 권력의 심급에서 드러난 욕망이 변질 되고 뒤틀려 강과 산 위에 떨어진다.
백발꽃은 지지 않았다_밀양
밀양 사태는 울산의 신고리원전에서 생산된 전기를 경남 창녕의 북경남변전소로 보내는 90.5킬로미터의 송전선로 건설을 둘러싸고 일어난 갈등이다.
76만 5000볼트의 송전탑은 주민들의 건강과 재산권을 위협했다. 인체 유해성 논란은 주민들을 공포로 밀어넣었고, 땅값도 폭락해 평생 일군 재산도 빼앗길 위기였다. 절차상의 문제도 컸다. 한전은 일부 주민들의 동의만으로 사업을 강행했다. 현금 살포로 주민 사이를 이간질시키기도 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2명의 주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수년 간의 싸움 끝에 2014년 6월 경찰은 마지막까지 반대하던 4개 마을에서 움막을 철거하고 주민들을 강제 진압했다. 많은 반대 주민들이 벌금과 소송, 트라우마에 시달려 치료를 받았다. 희망버스와 같은 연대 활동은 반원전, 탈핵 운동으로 이어졌다.
“못 배운 시골 늙은이한테는 함부로 해도 되느냐”는 말이 이 싸움을 설명한다. 밀양 할매, 할배들의 싸움은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국가에게 국민은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싸움이었다. 지더라도 선례를 남기는 싸움, 그래서 ‘밀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밀양 산에 박힌 하얀 백발꽃들은 지지 않았다.
후쿠시마에서_동일본대지진
2011년 3월 11일, 일본 도쿄 동북 370km 지점에서 규모 9.0의 지진이 발생했다. 9미터급 쓰나미가 밀려왔고 순식간에 1만 8000명이 숨지거나 실종됐다. 후쿠시마 원전도 버티지 못하고 폭발했다. 녹아내린 원자로에서 다량의 방사능이 유출됐다.
쓰나미는 상상 이상이었다. 바닷가 마을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마을이 있던 자리에는 널판지만 흩어져 있었다. 일상 생활은 불가능했다. 통신 두절로 잃어버린 가족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알 길이 없었다. 기름이 남아 있는 주유소 앞에는 긴 행렬이 늘어섰다. 생필품을 배급받기 위한 줄도 길었다. 자전거가 거리를 채웠다. 전기가 끊긴 마을은 캄캄한 밤을 맞아야 했다.
방사능 공포도 위력적이었다. 원자로 노출 소식에 사람들은 공항으로 밀려들었다.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차량행렬이 길었다.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대피소에서 얇은 마스크 한 장을 쓰고 공포에 떨어야 했다. 눈 앞의 참혹함과 눈에 보이지 않는 방사능의 공포를 동시에 겪어야 했던 후쿠시마에서 인류는 너무 작고 작았다.